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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에게 배우기
김진규 (공주대 교수)
금요일은 1교시부터 강의가 있어서 부지런을 떨어야 합니다. 막 연구실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전화 벨 소리가 울렸습니다. 수화기를 들으니 나이 지긋한 목소리로 자기는 한국은행 간부인데 김진규 교수가 맞느냐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좀 의외였습니다. 한국은행과는 거래도 없지만 대출 홍보라면 아가씨가 전화를 할 텐데, 라고 생각하니 요즈음도 흔히 걸려오는 보이스 피싱이 분명했습니다. 나는 단호하게 전화 속으로 말해주었습니다.
“저, 미안하지만 제가 강의 중이라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한국은행과 거래도 없습니다. 미안하지만 끊겠습니다.”
“아닙니다. 잠깐만요, ---”
“여보세요, 얼마 전에도 저의 아내가 보이스 피싱을 당했습니다. 필요 없는 말 그만 두기 바랍니다.”
“선생님, 저, 동인천중학교 때 제자 윤면식입니다. 선생님은 잘 모르실 거예요.”
나는 참으로 미안하고 부끄러웠습니다.
동인천중학교 때 제자 - 윤면식, 그에 대한 흐릿한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과묵하고 조용하며 성실한 학생으로 공부도 열심히 하는 모범생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정 형편이 어려워 고등학교에 진학을 못해서 검정고시로 대학을 진학했다는 소식은 전화를 통해 알았습니다. 한국은행의 경기도 책임자로 기관장이 되었답니다. 지역 신문사의 ‘잊지 못할 나의 스승’이라는 원고청탁으로 내가 생각났다는 것입니다.
그날 밤 윤 군으로부터 간단한 편지와 그의 글을 보내왔습니다. 참으로 반갑고 보람되면서도 어딘지 이제 내가 제자들에게 배우고 있다는 마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선생님께,
오랜 만에 불쑥 전화 드리는 무례를 범하였습니다만, 반갑게 대해주시니 감사드립니다.거의 40년 만에 선생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저는 1972년 동인천 중학교에 입학하였고, 고려대 경영학과를 거쳐 1983년 한국은행에 취직하였습니다.한국은행에서 주로 통화정책, 금융시장 관련 업무를 담당해 오다가 지난 3월 경기본부장(수원)으로 임명되어 처음으로 단위 조직의 장이 되었습니다.
이번에 지역 언론인 경기신문에서 5월을 맞아 "잊지 못할 나의 스승'이란 난을 마련하여 지역 내 주요 인사들에게 기고를 요청해 와 이에 응하게 되었습니다.졸고를 쓰는 과정에서 선생님의 행방을 찾다가 공주대에 계신 것을 알고 연락을 드리게 된 것입니다.부끄럽지만 졸고를 첨부해 드립니다.
저는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에 고택이 있는 명재의 13대 손으로 종손인 윤완식의 사촌 동생입니다.선생님께서 향토문화에도 관심이 크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혹시 방문하시게 되면 제 사촌 형에게 제 이야기를 해 주십시오. 종종 연락드리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잊지 못할 나의 스승>
한국은행 경기본부장 윤면식
「잊지 못할 나의 스승」에 대해 글을 쓰려 하니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나를 가르치셨던 많은 선생님들이 생각난다. 공자께서 “삼인행필유아사(三人行必有我師)”라 하셨듯이 주변의 평범한 사람들도 다 나의 스승인데 하물며 교단에서 직접 나를 가르치셨던 선생님들은 모든 분이 잊어서는 아니 될 귀한 은사님들 아니겠는가?
굳이 한 분을 택하여 쓰는 것이 제자 입장에서 불경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분은 중학교 때 국어를 가르치셨던 김진규 선생님이시다.
나는 1972년 동인천 중학교에 입학하였는데 그 때만 하더라도 빡빡머리에 검은 교복과 교모를 착용하고 선생님은 물론 상급생에게도 거수경례를 붙이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중학교에 갓 입학한 나에게 모든 선생님들은 엄한 훈육주임 선생님의 이미지를 가지고 계셨다. 당시 김 선생님은 사범대학을 졸업하시고 교편을 잡으신지 얼마 안 되는 젊은 분이셨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김 선생님은 수업에 혁신적인 방식을 많이 도입하시고 그러한 수업과정에서 학생들과 적극 소통하시면서 큰 형님과 같은 친근감을 보여 주셨다.
예를 들면 학생들로 하여금 수업의 일정 부분을 직접 가르치도록 하는 과제를 부과하셨다. 교단에 서서 선생님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맡은 부분을 충분히 예습하여야 하고 또 종전에 배운 내용 중에서 수업에 활용할 것을 찾는 과정에서 많은 복습을 하여야 했다. 어떤 내용은 여러 학생들이 써먹어서 반복되는 경우도 많았지만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암기가 되었다. 그래서인지 아직도 자음접변, 구개음화 등의 소리법칙이 생각난다.
또 다른 과제는 학교 선생님 중 한 분을 인터뷰하고 그 분의 프로필을 기사화하여 제출하는 것이었는데 나는 어떤 선생님을 인터뷰할까 고민하다가 김 선생님을 직접 찾아가 인터뷰하자 매우 좋아하셨던 기억이 난다.
작문시간에는 학생들이 제출한 시나 수필 중에서 신춘문예 심사하듯 당선작을 뽑아 평을 해주시고 학생들에게 작가 1호, 작가 2호 등의 칭호를 붙여 주셨다. 그리고 교과서에 나오는 시를 외워 낭송하게 하시고 모든 시를 외우면 국어 성적에 가산점을 주기도 하셨다.
김 선생님이 중학교 3년 동안 한 번도 담임이신 적이 없었는데 내가 여러 차례 같이 배구한 기억이 난다는 점에서 수업시간 외에도 학생들과 소통하셨던 교육자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수업방식이 지금은 흔할 수도 있겠지만 한 학급 학생수가 65명이나 되고 권위주의적 교육이 보편적이었던 당시의 상황에서는 학생들의 흥미와 참여를 이끌어 낸 선구적인 방식이었다고 생각된다.
현재 공주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님으로 재직 중이신 김 선생님께서 앞으로도 늘 건강하시고 오랫동안 후학 양성의 즐거움을 가지시기를 기원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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